경남 | "투쟁의 심장으로 다시산다"지부, 1지회 1열사 바로알기 사업 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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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남지부 작성일21-04-19 17:26조회6,4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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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는 싸울 때도 가르쳐 주셨고, 지금도 우리의 운동 좌표를 제시하고 있다”
지부가 솥발산 열사묘역에 잠들어 있는 열사의 삶과 정신을 바탕으로 교육사업을 진행 중이다.
지부는 39차 정기대의원대회에 열사교육사업을 결의하고, 지부 열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전체 지회가 1열사 지정사업을 진행했다. 전체 지회는 지부 열사위와 부울경열사회와 함께 ‘열사바로알기’ 확대간부 교육을 진행 중이며, 19일에는 대흥알앤티지회 확대간부들이 솥발산을 찾았다.
솥발산은 54분의 열사를 모셨다. 부산경남울산열사정신계승사업회는 “열사는 사회의 모순으로 타살되었거나 부당한 권력에 맞서 죽음으로 항거한 동지”라며 “솥발산 묘역에 계시는 열사들의 죽음 후에도 그 뜻을 계승하려는 많은 이들의 실천이 열사정신계승”이라고 전했다.
이날 솥발산 열사교육으로는 홍여표, 정경식, 박창수, 권미경, 양봉수, 박일수 열사묘역을 찾아 열사의 삶과 정신을 나눴다. 솥발산 열사묘역 교육은 5~6분의 열사를 찾아 교육을 진행 중이며, 마지막은 비정규직 열사를 찾아 교육을 마무리한다.
홍지욱 지부장은 “(솥발산 열사교육은)열사 바로알기 사업을 넘어 대안적 계기를 만들어 내는 의미가 크다”며 “교육의 초입이지만 현장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만큼 다양한 방식을 동원해 이 사업을 효과적으로 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날 지부는 열사를 통해 87년 노동자 대투쟁 전·후부터 97년 외환위기 이후 불거진 비정규직 투쟁까지의 노동역사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아래는 이날 찾은 열사 중 홍여표 열사와 정경식 열사의 삶이다.
▲홍여표 열사
1985년 효성중공업 창원공장에 입사한 열사는 2년 뒤 '효성중공업 노조정의회(노정회)'가 결성될 때 참여했고, 1988년 효성중공업노동조합 창원지부장에 당선됐다.
그는 이듬해 4월 노동조합 민주화 투쟁으로 구속되었고, 1989년 8월 효성중공업노동조합 위원장에 옥중 당선되었다. 그러나 효성 사측은 그를 해고했다. 열사는 1995년 마창노련 사무처장을 맡았다가 이듬해 민주노총 마창지역협의회 초대 의장에 당선되었다. 그 해 열사는 대림자동차와 한국산본 투쟁 지원으로 수배되었고, 1997년 '국민승리21' 대통령 후보 선거운동 중 긴급체포돼 구속됐다. 또 고인은 2001년 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2지부장을 지냈다.
열사는 2012년 위암 3기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했으며, 2014년 2월 13일 숨을 거뒀다.
▲정경식 열사
1984년 대우중공업에서 근무 하던 중 1986년 노조활동을 시작해 87년 2월 대우중공업 중식거부 투쟁에 참여했다. 열사는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활동을 했으며 87년 5월 사측 대의원을 만나는 과정에서 폭행을 당했다. 이후 6월 폭행과 관련해 이야기를 하자는 연락에 조퇴를 받고 회사를 나섰다가 그날로 실종되었다. 실종 이후인 88년 3월 2일 창원 불모산에 산불이 나면서 유골로 발견되었다. 당시 경찰은 신변을 비관한 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열사의 무게를 견딜 수 없는 얇은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았다는 정황과 산불이 났음에도 신분증은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없는 점 등 의문사로 남아 있었다.
정경식 열사의 어머니인 김을선 씨는 열사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했고, 창원대로에 서서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장례를 치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어머니의 투쟁으로 열사는 부족하나마 2010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확인되었으며 열사의 죽음에 정부의 개입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열사는 23년만에 장례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