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희망을 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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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기지부 작성일11-12-22 07:54 조회1,498회본문
“누가 날을 잡은 거야. 잡아도 하필이면 이런 날을 잡다니”
16일 오후 2시, 영하의 날씨에 수원 천주교 대리구청에 시민들과 경기지역의 노동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얼추 30여명. 이틀 전 평택의 밭에나가 뽑아온 배추를 절인다. ‘이 추운 날씨에 어떻게 1,000포기나 담근다는 걸까’ 막막함부터 앞선다. 하지만 어디 노동자들이 날 잡아서 해고되던가. 해고는 늘 갑자기 닥쳤다. 길게는 10년, 짧아도 2년 동안 차겁고 막막한 겨울을 살아왔다.
건설노동자가 드럼통에 장작불을 피우지만 차가운 기온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반쪽 낸 배추를 소금물에 담그고 대여섯 포기씩 봉지에 담아 소금을 뿌린다. 밑에 들어가는 배추에는 소금을 조금 뿌리라는 희망김장 기획자의 얘기에도 저마다 감각대로 움직인다.
대리구청안 식당은 마늘냄새로 가득하다. 씨알 작은 마늘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6쪽 마늘은 까 봤지만 이런 36쪽 마늘은 처음 다듬는다” 누군가의 얘기 그대로다. 어느 세월에 다 까서 다듬을까. 벌써 해는 저물어 근처식당으로 우르르 몰려가 저녁을 먹는다.
“김장비상!” 무슨 민방위 훈련이라도 하는 건가. “배추가 얼기 시작하고 있어요. 빨리 와서 절인배추를 전부 건물안으로 옮겨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문자와 전화로 비상이 걸린다. “소금물에 절인거니 절대 얼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러게 언다고 건물 안에 들이자고 했잖아요”. 입은 툴툴거리지만 바쁜 걸음은 절인배추를 향한다.
물이 흥건한 배추봉지가 가벼울 리 있던가. 안간힘을 쓰며 들어 올리던 여성들이 힘겨워 툭 내려놓는다. 해고 된 노동자의 삶의 무게에 비하면 솜털이 아니겠는가. 다시 갖은 인상쓰며 봉지를 들어 옮기는 건 해고노동자들의 무거운 삶을 맞들려는 마음의 힘 때문이리라.
“난리 났어요. 물이 새서 실내 바닥에 홍수가 났습니다” 피곤함에 잠들었는데 일어나라 재촉한다. 밤 11시 30분. 절인배추봉지에서 새어나온 물을 퍼내느라 정신이 없다. 이 밤중에 달려온 새 얼굴들이 보인다. 아예 발목을 걷어 올리고 물을 퍼내는 사람도 있다.
구멍난 비닐로 새는 물처럼 노동자들의 생존과 권리도 저렇게 줄줄 새왔던 세월이 아니었던가. 새는 물을 퍼내려는 저 몸짓처럼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그토록 맞서 싸워오지 않았던가. 절인배추의 물쯤이야 단지 잠을 깨는 소란일 뿐 오늘은 물을 퍼내는 우리의 손길이 이긴다.
“아니, 어머님들은 설렁설렁해도 금방 하던데” “이 사람아, 설렁설렁하는게 아니여. 30년 이상의 선수들이 하는 거야” 그렇다. 노련한 어머님들에 비하면 우리의 김장담그기는 어리버리한 난리법석이다. 하지만 찬바람 맞으며 밤 12시에 달려오는 저 노동자, 저 시민들의 연대의 마음은 결코 어리버리하지 않다.
새벽 1시, 난리를 치다 방에 앉으니 술을 권한다. 덜 절여진 배추를 안주삼다가 “짜다” “싱겁다” 저마다 판단이 엇갈린다. “짜니까 3시쯤에 씻어야 한다.” “싱겁다. 아침 6시에 씻어도 된다”는 논쟁한판 벌인다. “김치맛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갖는가가 중요한 거예요” 논란은 “김치냐 사람이냐”는 얘기로 막 널뛴다.
회사로부터 구조조정을 통보받을 때도 그랬다. 싸우자는 사람과 포기하는 사람, 해고자 중에도 정면으로 부딪치자는 의견과 생계부터 해결하자는 의견이 엇갈리지 않던가. 그러나 언젠가 현장으로 돌아가리라. 오늘 우리가 마침내 김치를 먹게 될 것처럼.
잘 짜여진 생산현장에서 정확히 자기 업무를 하는 노조간부들은 “ 뭔 일이 이렇게 앞뒤가 없냐”고 툭 던진다. 수원촛불시민들과 다양한 시민단체들은 들쭉날쭉한 작업에도 저마다 한자리씩 찾아 움직인다. 집안마다 김장방법이 다르다. “액젓이냐 멸치젓이냐”, “무채가 더 필요하다” “너무 많다”. “배추를 더 절여야 한다.” “그만 절여야 한다”. 시끌북적 아우성이다. 연대가 그렇지 않던가. 서로 달라도 김치를 완성하겠다는 마음은 같지 않던가. 다양성속에 하나됨이 연대가 아니던가. ‘과연 김장이 완성이라도 될까.’ 걱정 속에 다시 잠에 빠진다.
컴컴한 6시, 맹렬한 기세로 달려드는 추위속에 절인배추 봉지를 밖으로 꺼낸다. 새벽바람맞으며 달려온 노동자와 시민들이 합세한다. 장작피운 드럼통은 연기 가득 뿜어대고 잿가루 휘날리는 대지위로 꽁꽁 언 발길들이 움직인다.
사람이 꽃이라고? 무슨 얼어 죽을 얘긴가. 그냥 잘리고 흙속에 버려져 썩고 문드러저 그냥 나무와 꽃들에 빨아 먹히던 퇴비나 자양분이 아니었던가. 저 삼성에서 잘린 노동자, 쌍용차에서 해고된 이 친구, 포레시아에서 잘려서 이혼까지 한 저 형님, 흑자기업에서 두 번이나 잘려서 10년째 싸우는 저 누이들, 파카한일유압에서 잘리고 법정을 오가는 친구들, 세계적 기업 쓰리엠에서 잘리고 벌금에 짓눌린 저 동생들, 주식갑부가 된 회장님 밑에서 최저임금 받다 해고된 주연테크의 저 자그만 누이들... 모두 저 위대한 삼성, 저 대단한 기업들에 빨아 먹혀온 한낱 퇴비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얼어붙은 대지위로 배추를 나르고 씻는 저 발길, 저 손길, 저 마음이 꽃이 되려 몸부림친다. 날이 밝자 부산의 한진노동자들, 평택의 쌍용차 노동자들, 서울의 기륭전자 누이들, 공공산업노동자, 대학생, 촛불시민, 골프장 노동자, 신부님과 신도들, 노동단체회원들, 금속산업 노동자들이 꽃이 되려 달려온다. 밭에서 뽑아 짠물에 절인 배추와 꼼꼼히 다듬고 갈아 놓은 36쪽 마늘, 파, 무, 배가 섞인다. 나르고, 버무리고, 포장하며 1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끌북적 뒤섞인다.
낮 11시 30분, 김치 속이 떨어졌다. 살다보면 그런 것, 해고로 밥줄이 뚝 끊기듯 때로는 그런 것. “그러게 뭐랬어. 무채 부족할 거라니까. 왜 남을 거라고 했던거야” 그건 벌써 지난일, 밥줄 이으려면 탓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 해고된 노동자들이 먹는다는데 김치 속 팍팍 넣은 연대의 푸짐한 정이 아니던가.
아침부터 푹 삶은 고기에 김장김치 휘휘 감아 막걸리 한사발 곁들인 점심을 먹는다. “경기지역 문화 참 좋네” 기륭전자의 누이의 얘기에 “경기지역 문화가 좋으면 이리 해고노동자가 많겠습니까” 답해놓고, ‘아니지, 해고되더라도 이렇게 김장 버무리다 한 잎 쭉 찢어 양념에 휘감에 입에 쏙 넣어주는 이 문화가 어찌 좋지 않은가’ 홀로 되새긴다.
떨어진 재료 금방 구해 다시 김장을 버무린다. 10년이든 2년이든 그렇게 싸워온 해고 노동자들이 찬 겨울 버티며 자란 배추가 되고 학생과 시민들의 저 표정, 저 눈 빛, 저 마음이 양념이 되어 왁자지껄 버무려진다. 배추와 마늘, 손길이 뒤섞여 김치로 완성된다. 사람이 꽃이 된다.
후다닥 식당을 청소하고 조촐한 안주에 술잔 앞에 놓고 인사하고 노래하고 연극보며 희망김장행사 마지막으로 달린다. 회사에서 기수열외되고 왕따되어 그 모진 세월 보내느라 넉살이 늘었던가. 한잔 걸친 저 해고노동자의 얘기에 폭소를 터트리고 자청해 노래한곡 뽑으니 찬 겨울 고생은 치매 걸린 사람처럼 어느새 잊었다.
작은 꽃 화분 든 한국 쓰리엠 여성노동자가 밝은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아든다. “잘 모르시지만 저희는 10년에 한번 꼴로 노조 만들려고 했는데 전부 실패했고 또 싸우고 있어요” 수줍게 말 잇다가 울컥 눈물짓는다. “현장의 조합원들이 해고자들과 함께 여기 이런 자리에도 왔으면 좋을 텐데” 울음이 삼켜버린 그녀의 얘기는 어찌 이리 또렷한가. 그 마음 사무쳐 내 눈에 흐르는 뭔가를 카메라 렌즈 뒤에 가린채 닦아낸다. 우라질 이 ‘노동지옥, 기업천국’의 시절은 언제나 끝나련가. ‘복지국가, 따스한 자본주의, 생활정치’ 떠드는 정치계급에게 ‘닥치고, 투표’하면 새 세상이 오련가. 설치고 버무려 서로 나누지 않으면 그런 세상 어찌 올까. 희망김장 소식 듣자마자 김장독 미리 묻은 시그네틱스와 포레시아, 쌍용, 기륭, 이주민 센터, 파카한일 유압, 주연테크....깔끔하게 포장된 김장 박스가 하나둘 실려 나간다. 820만원 후원한 시민들과 어리버리 김장꾼의 마음이 버무린 김치는 저 해고되고 설운 노동자들 뼈가되고 살이 되어 사람 꽃을 피우리라.
희망김장 기획단을 맡은 ‘마녀’ 이선희가 뱉은 말, “내년엔 절대 안담글 겁니다”. 김장을 담그면서 수없이 그랬다. “그러면 내년엔 해고자 없는 세상 만들어야지” “에이, 내년엔 있어도 없다고 우기자” 그렇게 깔깔대며 웃었다. 참가자를 위한 작은 꽃화분에 한마디씩 적어 서로에게 나누며 헤어진다. 화분 하나에 쓰인 글귀에 눈이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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