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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복직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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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기지부 작성일11-12-07 08:23 조회1,33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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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복직을 부탁해”

박선희

나는 네 살 배기 여자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입니다. 엄마, 엄마, 엄마, 늘 부르기만 하던 그 이름의 주인이 되고 보니 달라진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기 울음 소리만 들려도 마음이 조급해져 낯모르는 아이라 해도 달려가 안아주고 싶고, 한 손에는 아이 손, 한 손에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낑낑거리며 버스를 타러 달려가는 아이 엄마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어깨가 측은해 보이기 시작했고 친정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존재들이 귀하고 애처롭다는 것을 엄마가 되고나서야 비로소 온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진실을 아이에게 반드시 알려줄 것이라 다짐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가 이 진실을 진실로 지킬 수 있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가진 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서슴없이 칼날을 휘두르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불평등과 억압으로 인한 분노가 쌓이고 쌓여 깊은 피로가 되어버린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그런 세상에 맞서 아주 오랜 시간 싸우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 회사에서 두 번이나 정리해고를 당한 서른 두 명의 시그네틱스 조합원들, 그녀들이 바로 긴 싸움의 주인공입니다.

김양순씨도 그 서른 두 명 중 한 분입니다. 두 아들의 엄마인 올해 마흔 일곱의 그녀, 스물 셋에 들어간 첫 직장이 바로 시그네틱스였으니 그곳에서 생의 절반을 보낸 셈입니다. 자식들을 위해 먹고 싶은 것도, 입고 싶은 것도 참고 또 참으며 검소하게 살아온 남편 덕분에 학자금 대출 한 번 받지 않고 큰 아들이 대학을 다니고 있다며 자랑스럽게 말문을 연 그녀는 두 번이나 자신을 거리로 내몬 시그네틱스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회사’라며 ‘사랑하니까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특별한 꿈 하나 가질 줄 몰랐던 내성적이고 평범했던 한 소녀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반도체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 해, 두 해 지나며 일도 손에 익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일한 그녀였습니다. 그리고 스물 일곱, 한눈에도 선량해 보이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손도 내가 먼저 잡았다며 좋으면 그래도 된다고 넉살좋게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두 번의 정리해고를 당한 고단하고 힘겨울 그녀들’이라는 나의 편견은 그녀에 의해 보기 좋게 깨졌습니다. 그녀는 그저 자식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환해지고 남편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나와 같은 평범한 엄마, 그리고 아내일 뿐이었습니다.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자기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던지 남편은 정말로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며 때로는 지나치게 성실해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지만 그녀도 성실하면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첫 아이 출산 하루 전 날까지도 퉁퉁 부은 발에 고무 슬리퍼를 신고 일을 했던 그녀입니다. 지금도 고된 밤샘 작업을 끝내고 자신의 출산을 축하하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와 준 동료들이 너무 고마워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소박하고 따뜻한 그녀. 엄마 품을 찾는 아이를 할머니에게 떼어놓고 3교대 근무를 하기 위해 늦은 시간 집을 나서기도 했던 그녀입니다. 그녀가 회사에 가고 나면 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고 또 울어 벽에 걸린 결혼 사진을 떼어 보여주며 간신히 달랬다는 시어머니의 말씀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찡합니다. 사진을 붙들고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던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보며 그녀의 심정은 얼마나 쓰라렸을까요. 아이가 기침만 해도 가슴이 철렁한 게 엄마입니다. 안아달라고 우는 아이를 외면하고 집을 나서야 하는 엄마의 심정이란, 어쩌면 어둔 길을 지나 회사로 향하던 그녀의 눈도 아이처럼 발갛게 물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내년이면 다섯 살이 되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일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도 내키지 않아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고민하는 나로서는 이미 20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그녀와 아이들이 겪었을 그리움이 애처로워 집에 와서도 한참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아침이면 내 손으로 정성스럽게 머리도 땋아주고 옷도 예쁘게 골라 입혀 유치원 차에 태워 보내고 가끔은 유치원에 몰래 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도 보고 싶은 게 엄마의 마음입니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를 내 손으로 맞아 꼭 안아주고 따뜻한 밥 차려 먹이고 싶은 게 엄마의 마음입니다. 그녀라고 다를 바 있었을까요? 그러나 그런 소박한 꿈도 실현할 수 없는 게 이 나라의 엄마들입니다. 출산 휴가 3개월이 지나면 백일이 갓 지난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놓고 허둥지둥 돈을 벌러 나가야 하는 게 이 나라의 엄마들 현실입니다. 그렇게 벌어도 빠듯한 살림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필요해서 돈을 벌려고 회사에 나왔던 것 아니냐, 그래놓고 회사에 청춘을 보상하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질타는 그녀들의 마음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20년 넘게 일하며 휴가 한 번, 결석 한 번 하지 않은 그녀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2001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서울 본사를 파주로 옮기는 사업이 마무리 되던 단계에 회사 측의 일방적인 안산공장 발령을 거부하던 노조원 130명 전원이 징계해고를 당한 것입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회사가 어려웠던 시절, 모두 힘을 합쳐 일해 파주로 함께 가자고 했던 회사 측의 말만 철썩 같이 믿고 월급까지 자진 삭감해 가며 일했던 그녀였습니다. 그녀 뿐 아니라 모든 사원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무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안산공장으로 가라니 그녀와 조합원들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나자 울분이 쌓여 진정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 했길래, 내 아이하나 내 손으로 살뜰히 키우지 못하고 청춘을 다 바쳐 일한 내 회사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견디기 힘들어 영세를 받는다는 큰 아들을 따라 성당에 나갔다가 그날로 신자가 되었습니다. 어디에라도 기대고 위로 받아야 했습니다.

그 날 이후 5년간 회사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투쟁이라는 단어도 동지라는 단어도 생소하고 낯설었던 그녀입니다. 그녀 뿐 아니라 함께 해고 되었던 대부분의 동료들이 그랬습니다. 그랬던 그녀들이 한강철교에 올라가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단식,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승소 판결을 받아 다시 복직하게 된 것이 2007년. 복직된 후 참기 힘든 차별과 이간질 속에서도 묵묵히 일해 온 그녀는 3년 만인 2011년 7월 다시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서른 두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아무 잘못 없이 한 회사에서 두 번이나 정리해고를 당한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버젓이 자행되는 세상 속에 나의 아이가 발을 딛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끔찍했습니다. 그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기 싫을 정도로 정나미가 떨어졌을 법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시 한번 그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싸우기로 했다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처음 해고당한 이후 5년은 억울함에 멋모르고 싸웠다 치자. 그러나 그 세월의 고됨과 힘겨움을 모두 알고 있는 지금 어떻게 또 그 세월을 견딜 힘을 낼 수 있는지 그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습니다. 돈이 문제라면 다른 회사에 가서 벌어도 될 일 아닌가. 조심스런 물음에 그녀는 특유의 선량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띄면서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청춘을 모두 바친 곳이므로 이렇게 떠나기엔 너무 억울하고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모유 수유를 하던 둘째 아이 갓난아이 시절, 불어난 젖 때문에 작업복이 젖어 곤혹스러운 와중에도 일하는 손을 쉴 수 없어 고생하고, 엄마 품이 그리워 우는 어린 아들을 떼어놓고 밤 근무를 하면서도 그만 둘 생각 같은 것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곳이 바로 이 곳입니다. 그녀에게 시그네틱스는 단순한 일터가 아닙니다. 그녀의 인생이 오롯이 담긴 곳입니다. 인생의 절반이상을 보낸 일터에서의 시간들이 그녀라는 사람을 증명하는 소중한 역사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요?

그제서야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시그네틱스로의 복귀는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저 돌아가는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누구보다 성실했던 그녀에게 이 사회는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관심이라는 무기로 또 한번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그녀 몫인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꿈이 무엇이냐고 묻자 조금도 주저 않고 파주에 가서 일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파주에서 일하며 솜털이 아직도 보송보송한 어린 생산직 노동자 친구들에게 과연 옳은 것이 무엇인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왔던 그 정신을 전해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길고 고된 싸움을 앞둔 그녀의 얼굴에 다시 한번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그녀를 보며 나의 아빠, 엄마, 남편, 언니, 남동생, 그리고 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우리의 엄마, 우리의 누이, 당신의 아내 혹은 당신의 딸...

 

* 이글은 12월 17일 수원에서 장기투쟁사업장과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함께 하는 희망김장담그기를 앞두고 장기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을 인터뷰해서 한겨레 21과 오마이뉴스등에 실리는 내용의 첫번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