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독재 이병철 시대 1부 정치적 자본가의 탄생 1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삼성일반노조 작성일17-08-18 12:56조회25,499회 댓글0건
관련링크
본문
삼성독재 이병철 시대 1부 정치적 자본가의 탄생 1
정치적 자본가의 탄생
정치적 자본가와 천민자본주의
정경유착의 시작
해방공간에서 기업의 자리
1945년 8월15일,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났다. 해방이 되자 인민은 국가 체제를 새롭게 정립할 기대감에 부풀었다. 인민은 새로운 국가 체제로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성향이 뚜렷했다. 미군정청 여론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가 사회주의를 바랐다. 자본주의를 바란 사람은 14%였고, 공산주의를 바란 사람도 7%였다.
해방 직후 노동자들은 자신이 공장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일본 기업가가 떠난 공장을 노동자들이 접수하고 자주적으로 관리하려는 움직임도 일었다. 기업 경영 방침은 노동자나 인민의 뜻에 따라야 했다. 인민의 요구에 따를 때에라야 기업은 의미가 있었다.
기업은 사회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공공의 이익에 복무하는 집단이었고, 기업의 사회적 가치는 사회의 계급적 다수가 공유해야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처럼 “기업 없이는 노동자도 없다”라거나 기업가를 우러러 보는 풍조는 있을 수 없었다. 기업은 기업가의 ‘사적 사유지’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사회적 가치에 따라 함께 만드는 ‘공공의 터전’이었다. 또한 기업가는 일자리를 베푸는 시혜적 존재가 아니라 공공의 가치를 함께 구현하는 사회 구성원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인민이 모든 기업가를 ‘악’으로 내치지는 않았으며 노동자만의 세상을 그리지도 않았다. 기업가와 함께 공장을 움직이고, 국가의 생산성을 증대하고, 경제적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생활의 안정을 신속하게 찾으려 했다.
생산수단의 사회적 관리를 주장하던 사회주의자들조차 양심적 기업가를 껴안아 새로운 조국의 경제적 토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산업 건설 운동을 벌였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제외한 진보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민족통일전선정권의 수립에 적극 참가”하고, “민족자본의 양심적인 부분과 협력하여 산업을 건설함으로써 부족(不足) 공황 및 악성 인플레를 극복”한다는 실천 요강을 발표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아야 하듯이 “정당한 이윤은 반동적인게 아니고 애국적▪애민족적▪양심적 자본가의 이익은 보장되어야”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노동자와 기업가가 공정하게 이익을 분점해야 하고 기업은 사회와 국가를 위해 복무해야 했다. 그게 상식이었다.
이처럼 사회는 기업을 사회 공공의 가치 안에서 통제했고 기업은 사회적 공익을 증진하는 기회와 책무를 부여받았다. 기업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만, 그 사적 이익도 공적 가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국이 분단되고 반쪽 정부가 제헌헌법을 만들 때까지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여전했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고,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 라는 전제 아래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하고,”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해야)한다“ 라는 원칙을 밝혔다.
당연히 ”농지는 분배“해야 했다. 토지는 ‘일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리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 노동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 라고 명시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해 구조적으로 힘의 관계에서 기업가에게 밀릴 수밖에 없는 노동자를 위해 법적 보호 장치도 마련하고 있었다. 1953년에 제정된 노동법은 형식적 틀에서나마 노동자에게 파업을 포함한 정당한 쟁의행위에 대해 민형사상의 책임을 면해주는 권리를 인정했다.
조국이 분단되고 나서도 경제 질서의 밑그림에 기업가가 인민위에 군림하는 일은 애초부터 허용되지 않았다. 기업은 사회 공공적 가치의 테두리 안에서만 경영되어야 했다. 그것은 시장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걸 의미했으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 자본주의였다.
미군정과 노동자투쟁
국가 건설 초창기에는 국가 경제의 토대가 되는 자산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가질 것인지 규칙을 정하는 문제가 중요했다. 국가 자산을 어느 정치사회세력이 어떻게 분배하느냐에 따라서 정치▪경제에 대한 전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국가의 자산을 구성하는 주요 자원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이식한 자본의 결정체인 적산(敵産, ‘적의 생산시설’ 즉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소유한 기업 및 재산), 그리고 미국이 지원한 원조 물자였다.
해방 직후 좌우를 아울러 다양한 정치세력이 등장했고, 그들과 연계된 노동자 인민과 기업가 세력들이 복합적으로 교차했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공통 목표를 이루면서 정치세력들은 국가의 구조, 특히 경제체제의 성격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치열한 투쟁은 불꽃 튀는 전쟁 그 자체였으나, 누구의 승리로 끝나든 새로운 국가의 경제구조가 인민과 사회의 통제에 있게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희망은 미군정의 등장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미군정은 인민이 선택한 정부가 아니었다. 미군정은 점령군으로서 오히려 과거 식민지 체제를 복원했다. 인민이 바라던 새로운 사회와 정반대의 국가와 시장이 만들어졌다. 사회적 공공성을 지지하는 인민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인민의 삶은 생산 감축, 높은 인플레이션, 대량 실업, 식량 부족, 저임금 등의 난관에 부딪쳤다. 1946년 4월<영남일보>의 기사처럼 “쌀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일제 식민지 경찰▪행정체계가 해방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자 생활고에 대한 불만이 정치적 문제로 불거졌다. 더욱이 일제부역자들은 식량을 어디서 구했는지 창고에 쌓아놓다가 발각되는 일도 있었다. 인민의 정치적▪경제적 불만은 치솟았다. 전국 각 지역에서 ‘쌀 획득 투쟁’이 벌어졌고, 마침내 저항의 불꽃이 튀었다. 1946년 9월, 철도 노동자들이 식량과 임금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며 파업을 벌인 것이다. 철도 파업은 전평 지도부에 의해 전국 총파업으로 확산되었다.
대구에서는 ‘10월 인민항쟁’이 일어났다.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하자 사태는 더욱 격화되었다. 항쟁은 경남, 전남, 충남, 강원 지역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남한 전역으로 퍼진 소요는 미군정의 정책에 대한 노동자와 농민의 강한 불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대구에 계엄을 선포하고 탱크를 앞세워 시위 군중을 진압했다. 미군정은 전평 지도자 다수를 검거하며 노동 조직의 정치적 역량을 압살했다.
9월 총파업과 뒤이은 인민항쟁의 파도가 가라앉자 미군정은 좌익노조를 본격적으로 탄압했다. 12월 9일, 미군정 노동부는 “정치운동을 하는 단체나 그 연합은 그 명칭의 여하를 불구하고 노조로 인정할 수 없다”라며 노조의 정치활동을 사실상 금지했다.
노조의 경제투쟁만을 허용한 조치였으나, 그 뒤로도 미군정이 단순한 임금 인상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정치적 활동을 제약당한 노동자는 그렇게 경제적으로도 소외되었다.
노동자의 정치적 역량이 무너진 토대 위에 국가권력과 기업가의 결탁이 본격화되었다. 사회적 공공성은 부정되고, 인민과 사회의 통제 아래 두고자 했던 기업이 국가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해나갔다. 그리고 그 선두에 삼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