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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제5주기 김주익곽재규열사 정신계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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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산양산지부 작성일08-10-17 10:03 조회2,8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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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주기 김주익․곽재규열사 정신계승제 2008. 10. 16(목) ~ 10. 24(금) 한진중공업 지회 김주익 열사는 2003년, 129일동안 35m 지브크레인에 올라 '불법해고철회, 노조간부징계철회, 손배가압류 철회, 민주노조 사수, 2002년 임단협 승리'를 위해 투쟁하시다 2003년 10월 17일 크레인에서 자결하셨습니다. 한진중공업 지회 곽재규 조합원은 열사투쟁과정에서 2003년 10월 30일, 85호크레인 아래에 있는 4도크 11m 몸을 던졌습니다. 아래와 같이 두열사에 대한 5주기 추모제를 갖습니다. 제5주기 김주익․곽재규열사 정신계승제 2008. 10. 16(목) ~ 10. 24(금) 추모 깃달기 / 추모 현수막 게시 솥발산 열사묘지 합동참배 ▶10월 18일 오전 11시.양산 솥발산 공원묘원 열사 5주기 열사정신계승제 ▶2008년 10월 24일(금) 오전10시 한진중공업 단결의 광장 추모기간 여러 가지 행사 ○ 추모사진 순회전시회. ○ 추모글 공모 및 시상 - 시, 수필,소설, 기행문 등 -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 협력업체, 사원등 누구나. [5주기 선전물] 2003년 11월 15일, 언론들은 ‘한진중공업, 노조에 백기’를 들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승리했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노동자들의 눈에는 눈물만 흘렀다. 1987년, 저임금과 복지는 없고, 죽거나 장애가남는 산업재해, 꽁보리밥 도시락. 노예같은 작업장. 암흑이었다. 7월 25일, 수천명의 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노동3권 보장, 어용노조 퇴진, 일당 1,500원 인상, 해고자 복직 등 20여개의 요구를 내걸고 ‘봉기’했다. 사과탄(최류탄의 일종)을 던지고 진압봉을 휘두르며 노동자들을 공격하던 폭력경찰. 노동자들은 지게차와 물탱크, 쇠파이프,망치를 들고 6일간의 격렬한 투쟁 끝에 민주노조의 깃발을 세울 수 있었다. 회사는 ▲연300%상여금지급 ▲통근차비폐지 ▲어용노조퇴진 ▲식사개선 등에 합의하였다. 구속, 해고, 손배가압류, 죽음… 그러나 권력과 자본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91년 5월, 골리앗투쟁을 벌이던 대우조선노동조합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연대파업을 논의했다는 이유로 박창수 위원장을 구속시키고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갔다. 해마다 노동법 절차를 거친후 파업을 벌이면, 회사는 ‘일방중재’(당시는 회사가 노동위에 중재를 신청하면 파업이 불법이었다.)를 이용하여 파업을 불법으로 몰고, 경찰이 투입되었다. 파업만 하면 노조에 ‘손해배상’이 청구되었다. 노동조합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1994년 6월 28일, 조합원 1,000여명이 한국 최초로 건조되고 있던 42m 높이의 LNG선에 올라 열흘동안 선상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으로 조길표 위원장과 김주익 사무국장을 비롯하여 6명이 구속되거나 해고되었다. 교섭결렬, 파업, 일방중재, 손해배상청구는 거의 해마다 되풀이 되었다. 1996년에도 박재근 위원장등 3명이 해고되었다. 1937년 ‘朝船중공업’으로 출범하여 한국 조선산업의 모태였던 한진중공업의 임금과 근로조건은 다른 조선소에 비해 60~70% 수준에 머물렀다. 김주익, 역사의 짐을 지다 1994년 LNG선상파업투쟁으로 구속, 해고되었다가 복직한 김주익은 2000년 위원장을 맡으면서 자본과 권력의 탄압을 뚫고 나갈 역사의 짐을 떠안았다. ‘관리직 30%, 50세이상 현장직 구조조정’이란 말이 도크를 떠돌았다. 소문은 2002년 3월에 현실로 나타났다. 400여명이 회사의 강요에 의해 사직서를 쓰고 일터에서 쫒겨났다. 부당노동행위 고소고발, 신관로비점거 및 항의집회, 담벼락 스프레이작업, 부분파업, 서울본사 상경투쟁을 벌리며 회사의 강제사직행위를 일단 중지시켰다. 그러나 또 날벼락이 떨어졌다. 50세 이상의 노동자 138명에 대한 교육이었다. 교육자에 대해 ‘희망퇴직’도 받는다고 했다. ‘위도우와 엑셀교육’까지 포함된 강좌를 듣고 ‘리포트’까지 써내라고 하는 황당한 교육. 한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선배노동자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교육, 현대판 ‘고려장’이었다. 김주익 위원장과 노조간부들은 단식하고, 선배노동자들과 똘똘 뭉쳐 교육거부하고, 집회하고. 교육이수후 ‘원직복직’시키는 합의를 만들었다. 그러나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자택대기발령, 공무부 대기발령’, ‘또다시 교육’으로 내몰았다. 엎치락, 뒤치락하는 사이 ‘한’을 안고 일터를 떠나는 선배노동자들도 있었다. 모두 600여 명이 일터에서 쫓겨났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85호 크레인에 오르다 2002년 6월 5일 금속노조로 전환한뒤 회사는 임단협 교섭에 모습도 비추지 않았다. 조선 경기는 호황이었으나 회사는 ‘임금동결’을 주장했다. 다른 조선소는 기본급 10만원 인상에 타결을 지었다. 2002년 임단협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지회장선거가 치러졌다. 불법해고철회, 노조간부징계철회, 손배가압류 철회, 민주노조 사수, 2002년 임단협 승리를 위해 김주익이 다시 나섰다. 2003년에도 회사의 태도는 여전했다. ‘임금동결’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조합비가압류, 간부20명 집과 봉급가압류. 해고, 징계. 6월 11일 폭우가 쏟아지는 한밤중에 김주익지회장은 32m 높이의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김주익 지회장은 공개된 편지에서 회사에 대해서는 ‘만약, 저를 끌어내리기 위해 술수를 부린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뛰어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고 경고했다. 조합원들에게는 ‘직․기장 및 관리자의 통제를 벗어나 노동자의 길을 갑시다’고 호소했다. 회사는 7월21일, 서울에서 개최된 노사정교섭에서 서로 접근한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번복했다. 한진중공업 노조 역사상 처음으로 85호크레인 아래 야드에 수십개의 천막이 쳐지고 울산지회 조합원을 포함하여 500여명이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회사는 특수선 조합원들 집으로 손배가압류 통보서를 보냈다. 10월 14일, 회사는 잠수부와 2,500톤 해상크레인, 수백명의 관리자들을 동원하여 조합원들이 지키고 있던 4도크 6,000teu급 컨테이너선을 강제로 진수시켰다. 회사는 관리자들을 모아 ‘수고했다’며 축하파티를 열었다. 죽음으로 탄압의 종지부를 찍다 10월 17일 아침. 천막농성장을 지키던 70명의 조합원은 85호 크레인위의 김주익 지회장을 볼 수 없었다. “노동자가 한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 이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유서중에서) 열사에 대한 죄스러움과 권력과 자본에 대한 분노의 눈물과 투쟁 뒤늦게 조합원들이 85호 크레인으로 다모였다. 부산에서, 서울에서 전국의 노동자들이 85호 크레인 아래로 모였다. 10월 30일, 곽재규 조합원이 크레인 아래있는 4도크 11미터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조합원들과 전국의 노동자들은 김주익 열사에 대한 죗값을 치루기 위해, 김주익․곽재규 열사가 짊어지고간 그 한을 풀어야 했다. 단결하지 못한 그 죄스러움 때문에 흐르는 눈물, 김주익․곽재규열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권력과 자본에 대한 분노로 치솟아 오르는 눈물을 흘렸다. 한달동안 천막에서, 길거리에서 열사들의 한을 풀기위해 스스로 뛰어다녔다. 5주기 추모행사 10월 16일(목) ~10월 24일(금) 추모 깃달기 / 추모 현수막 게시 솥발산 열사묘지 합동참배 ▶10월 18일 오전 11시.양산 솥발산 공원묘원 열사 5주기 열사정신계승제 ▶2008년 10월 24일(금) 오전10시 단결의 광장 추모기간 여러 가지 행사 ○ 추모사진 순회전시회. ○ 추모글 공모 및 시상 - 시, 수필,소설, 기행문 등 -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 협력업체, 사원등 누구나. --> 인쇄선전물 은 용량이 많아 첨부하지 못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