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수 열사 18주기 추모제
페이지 정보
작성자 부산양산지부 작성일09-04-25 12:24 조회1,529회첨부파일
- 564035208_c0fe1730_B9DABFADBBE718C1D6B1E2BCB1C0FCB9B0.pdf (451.4K) 195회 다운로드 DATE : 2009-04-25 12:24:12
본문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 박창수열사
1958년 7월 28일 부산에서 출생
1979년 2월 부산 기계공고 졸업
1981년 5월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배관공으로 입사
1990년 7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당선, 부산노련 부의장
1991년 2월 구속, 서울구치소 수감
1991년 5월 4일 의문의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
1991년 5월 6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노동자의 목숨을 노리는
가진 자들의 탐욕은 어찌 이리도 똑같습니까
“재벌의 나라에서 가난한 노동자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기를 염원하던 사람
폭압의 세월에 목숨바쳐 전노협을 지키고 죽어서도 투쟁의 깃발을 놓지 않은 노동자”
- 박창수열사 묘비문 중에서 -
박창수 열사가
자본과 권력의 탐욕에
죽음을 당한 지 18년.
평생을 일터에서 몸바친
대우버스 노동자들은
오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18년 전에 불어닥쳤던 노조탄압과 대학생들의 ‘등록금 인상반대’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앞에서 학원자주화투쟁(학교의 일방적인 등록금 인상고지에 반대)을 하던 강경대 학생이 경찰에 집단폭행을 당해 맞아죽는 일이 발생했다.
학생들뿐 아니라 재야 시민단체들도 노태우정권의 폭력만행에 치를 떨며 각종 집회를 열고 백골단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서 ‘노태우정권 타도’를 외치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각사업장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위해 자본가들과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대우조선에서는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하며 생명을 건 투쟁을 했다.
살기위한 투쟁 - 108m 골리앗 ‘천지작전’
1987년 노동자 대투쟁(7,8,9월)을 통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어용노조를 민주화시키는 등 급성장한 민주노조진영은 1990년 1월22일 전국 조직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 위원장 단병호. )’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그해 12월9일에는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동조합회의(이하 ’대기업 연대회의‘)’가 결성되었다.
부산에서는 한진중공업, 대우정밀 등이 참가하는 ‘부산노동조합 총연합(의장 이성도)’이 출범하였다.
당시 전두환 살인정권의 대를 이은 노태우정권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노동조합 탄압을 주목표로 삼았다.
대우조선 노동조합은 1990년 11월부터 단체협상을 시작하였다. ▲인사 및 징계에 관한 요구 ▲구속자에 대한 요구 등이 ‘인사 경영권에 관한 사항’이라는 노동부의 지침때문에 사측으로부터 거부당하는 주요 쟁점이 되었다. 대우조선 노조는 결사대 51명이 108m높이의 골리앗에서, 6천여명의 조합원은 땅에서 투쟁을 전개하는 ‘천지작전’으로 2월 8일부터 2월 13일까지 결사투쟁을 전개하여 유니온 샵, 인사권에서 유리한 사항을 쟁취하였다. 대기업 연대회의는 1991년 2월 9일과 10일 의정부 다락원 캠프에서 간부수련회를 열고 대우조선의 파업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연대파업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수련회를 급습하여 수련회에 참석하였던 60여명의 간부를 전원 연행하고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위원장 등 7명을 ‘제3자 개입금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시켰다.
노동조합을 탄압한 권력과 자본
노태우 정권은 노동자 투쟁의 핵심으로 떠오른 ‘전노협’을 불법 노동조합으로 규정하면서 전노협와해를 위해 모든 국가권력을 동원하였다. 특히 부산노련의 와해를 목적으로 한진중공업, 대우정밀, 고려 부산노조 등을 목표로 경찰뿐 아니라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 현재 국가정보원의 전신)까지 동원하여 전노협 탈퇴공작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안기부는 구속된 박창수열사뿐 아니라 노조간부에게도 접근하여 ‘전노협을 탈퇴하면 박창수위원장을 풀어 줄 수 있다’며 갖은 공작을 다했다. 그러나 박창수 열사는 ‘내가 전노협이다’며 국가 권력기관의 협박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노동자 연대투쟁을 논의하던 박창수위원장 구속
박창수 위원장은 수감중이었던 안양교도소에서 5월4일 의문의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는 5월6일 사망한 채로 병원 마당에서 발견되었다. 박창수위원장의 죽음에 대해 정부는 비관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자살할 사람이 링겔병을 7층 옥상까지 가지고 간 것과 병원전체의 창문과 옥상으로 통하는 문은 병원측에서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쇠창살과 열쇠로 잠궈놓은 상태를 볼 때 도저히 자살이라고 볼 수 없었다. 또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을 당시 안기부 요원이 계속적으로 접촉을 가졌고 의문사 당일 저녁에 신원미상의 젊은 괴청년이 병실을 방문한 사실과 안기부 직원이 전화를 통해 계속적으로 박창수 동지와 통화를 부탁해온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전노협 탈퇴를 종용해 오던 안기부에 의해 살해된 것이 분명했다.
무장경찰 ‘백골단’, 박창수열사의 죽음
열사가 사망한지 하룻만인 5월 7일, 노태우정권의 폭력경찰 1,000여명은 열사가 안치되어있는 안양병원 영안실 벽을 뚫고 진입하여 열사의 시신을 탈취해갔다. 열사의 시신에 칼을 그어대는 강제부검을 해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핑계였다. 그리고 영안실을 지키고 있던 노동자 학생등 15명을 구속시켰다. ‘천인공노’였다.
5월과 6월, 타오르는 분노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죽음의 진상을 은폐하고, 영안실 벽을 뚫고 시신까지 강제 탈취해 간 사태는 노동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5월 7일 오후 6시. 안양병원 앞에 모인 3천여 명의 노동자들은 화염병과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폭력경찰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5월 9일에는 전국 98개 노조 4만명이 ‘박창수 위원장의 살인진상 규명과 노동운동탄압분쇄’를 위한 총파업을 단행하고 거리투쟁을 벌였다. 18일에는 150개 노조 10만여 명이 총파업을 벌였고 450개 노조는 출정식과 규탄집회후 저녁에 전국에서 열린 국민대회에 모여들었다. 5월 25일과 6월2일 국민대회가 계속 이어졌다.
6월 12일에는 1천여 명의 한진중공업 노조 조합원들이 상경하여 박창수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안양병원과 서울을 오가며 4일동안 ‘진상규명, 노동탄압분쇄, 노태우정권 타도’를 외치며 투쟁하였다.
솥발산에 묻힌 박창수열사, ‘내가 전노협이다’
6월 29일. 열사는 안양에서 부산 영도로, 부산 영도에서 양산 솥발산으로 갔다.
밤늦게 어둠속에서 열사를 솥발산에 안장하였다.
박창수 열사의 분신이었던 ‘전노협’은 1995년, 민주노총을 잉태하면서 발전적으로 해소하였다. 그리고 전노협에 소속된 금속노동자들은 여러경로를 거쳐 지금의 금속노조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다.
■ 정신계승기간 : 2009. 4.27(월) ~ 5.6(수)
■ 지부 전조합원 리본달기
■ 묘소참배 : 5. 1(금) 오전 11시 양산 솥발산
■ 노동절 및 합동추모제 :
5.1 오후 1시30분 부산역 광장
■ 열사정신 계승제 :
5.6(수) 11시 한진중공업 단결의 광장
한진중공업 박창수열사 제18주기 정신계승제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 한진중공업 지회 / 부산울산경남 열사정신 계승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