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독재 이병철 시대 1부 혁명도 빗겨간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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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삼성일반노조 작성일17-08-23 12:50 조회25,118회본문
삼성독재 이병철 시대 1부 혁명도 빗겨간 삼성
이병철 내각?
1959년 어느 날이었다. 이병철의 인척이었던 박준규가 이병철 집을 찾았다. 이병철은 백지를 앞에 놓고 이름을 적고 있었다.
“아재, 뭐하십니까?”
“박 군, 잘 왔다, 좀 도와도.”
뭐하는 지 보니, 자유당 내각 명단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 사람 어때?”
“명단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서교동(이기붕의 집)에서 달라고 해.”
삼성권력은 급성장했다. 삼성은 이승만 정권에서 가장 잘 나가는 정치적 기업이었다. 이병철의 영향력은 이승만 정권의 권력을 편제하는 데 직접 관여할 만큼 강력했다. 3▪15부정선거가 일어나기 바로 전 해인 1959년, 이병철은 집에서 자유당 내각 명단을 작성했다. 이병철이 작성한 명단은 이승만 정권의 2인자 이기붕의 집으로 전달되었다.
더 이상 삼성은 시장에서 촉망받는 단순한 기업이 아니었다. 삼성은 그 자체로 어떤 정당보다 강력한 정치조직이었다. 이병철이 내각 구성에 개입한다는 것은 내각에 입성하려는 수많은 정치인을 이병철의 발밑에 두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자유당 내각 명단 송부가 실제로 반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단순히 참고 수준이라 하더라도 이병철의 정치적 힘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권력기관이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지 않은 사기업에 의해 뿌리째 흔들렸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에서 이병철이야말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 실세였다.
삼성의 이승만 정권 내각 선정 개입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승만 정권에서 삼성의 성공은 곧 정치의 승리였다. 정치적 성공에 비한다면 경제적 성공은 오히려 부차적이었다. 삼성은 경제의 지배자를 뛰어넘어 ‘국가의 지배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한국 정치의 상수(常數)가 되고, 정치 지형의 변화와 상관없이 지배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이른바 ‘삼성 신화’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미완의 4▪19혁명
재벌의 성장은 국가의 자원을 배분하는 정치적 과정에 국민의 뜻이 배제된 비민주적 경로를 따라 이뤄졌다. 그것은 정치의 공공성을 훼손한 결과였으며, 구체적으로는 정치세력과 유착한 부정과 부패의 산물이었다. 정치자금 제공뿐만 아니라 귀속재산 부정 취득, 정부 보유 달러 부정 대부, 공공 공사 부정 이득 취득, 외자 구매의 부정 이득, 국세 포탈, 재산 해외 도피 등은 정치권력과 결탁해서 국가 자산을 약탈한 권력형 부정이었다. 이는 민주주의의 파괴를 통해 시장경제 질서를 왜곡하는 것이었다.
이병철이 이승만 정권에 제공한 정치자금은 4억2,500만 환이고, 귀속재산 및 국유재산 불하 부정액이 5,395만7,827환이며, 조세 포탈액이 33억501만7,931환이었다. 제일제당 창립 당시 자본금이 2천만 환이었으므로 대단히 큰 액수였다.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분노의 화살이 삼성을 비롯한 재벌을 겨눈 것은 필연이었다.
1960년 5월5일 부정축재자 재산 몰수를 요구하는 데모가 탑골공원에서 일어났다. 이후 학생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며 정부를 압박하자 검찰은 급기야 5대재벌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뒤를 이은 허정 과도내각은 부정축재자 처리에 미온적이었다. 허정 과도내각은 “혁명을 비혁명적인 방법으로”라는 구호를 즐겨 썼다. 이승만 정권의 마지막 외무장관을 지낸 허정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 혁명의 기운을 가라앉히는 데에만 급급했다. 그러니 혁명의 정신이 제대로 구현될 리 없었다. 부정축재자 처벌은 계속 지연되다가 8월14일에 발족한 민주당 정부로 이양되었다.
그러나 그 후 집권한 민주당과 장면 정부도 혁명 정신을 구현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혁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역행했다. 7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은 기업가들에게 정치자금 제공을 요구함으로써 부정축재자로 지탄받으며 움츠러들었던 기업가들에게 숨통을 터주었다. 기업가들은 정치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모임을 만들었고 그 모임은 1961년 1월에 한국경제협의회로 발전한다. 부정축재자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자들이 부정축재자를 제대로 처벌할 리 없었다. 정치적으로 상극이었던 자유당과 민주당도 재벌 정책에 있어서는 앞집 뒷집이었다.
장면 정부는 국민의 거센 요구에 떠밀려 1961년 2월 9일, 민의원에서 부정축재자처벌법을 통과시켰고 법안은 참의원에 회부되었다. 그러자 민주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한국경제협의회로 모인 기업가들이 조용히 있지 않았다. 한국경제협의회는 공개적으로 거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부정축재자처벌법이 “북한 괴뢰에게 일석이조의 성공을 약속하는 것”으로 법안의 최종 통과는 김일성의 공산화 음모에 길을 닦아주는 것이며, 이 법안이 노리는 것은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규정하더라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관련자들이 협의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부정축재자로서 처벌 대상이었던 기업가들이 바로 자신에 대한 처벌 문제를 정부 및 국회와 협의하게 된 것이다. 기업가들이 자신의 권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결국 부정축재자처벌법은 누더기가 되었다.
처벌 대상자의 범위는 대폭 축소되었다. 참의원은 4▪19혁명이 정치혁명이지 사회경제혁명은 아니라며 부정축재자 처벌 대상을 3▪15부정선거와 관련해서만 다룬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결국 처벌 대상자를 “자진해서 3천만 환 이상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자”로 규정했는데, ‘자진해서’라는 전제 조건에 해당하는 자는 3천만 환 이상을 제공한 26명 가운데 1억 환 이상을 제공한 9명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 삼성물산은 정치자금 제공액이 3억 환으로 밝혀져 처벌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처벌 대상 범위가 대폭 축소되면서 처벌의 강도 또한 누그러질 것이 뻔했다.
실제 법 집행에서도 한계가 많았다. 부정축재처리에대한특별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할 무렵, 특정 재벌이 현직 장관을 통해 3억 환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일이 벌어졌다. 법 집행을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아닐 수 없었다. 부정축재환수금의 처리도 현금 환수보다는 정부가 지정하는 사업에 강제 투자하게 함으로써 벌과금을 상쇄하도록 했다.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벌은 끝내 완결되지 못했고, 해방 이후 왜곡된 사회▪정치▪경제구조를 혁명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